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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인터넷 혁신, 실재를 가상에 세우다.

 

“Ce n'est pas parce que

 c'est inventéque

 ça n'existe pas”


“지어낸 것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1.

위 문구는 최근 국내에도 상영된 프랑스 애니메이션 ‘엘레노의 비밀’의 주인공(난독증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어린 소년)이 읽어내야 할 주문 내용이다. 암호해독과 같은 거창한 작업은 아니지만, 당사자인 주인공에게는 참으로 용기를 내어야만 가능한 일로서 그려진다. 우리 집 막내 또한 동화책을 읽어주기만을 좋아하고 자기 스스로 읽기를 꺼려하여 부모로서 조금 염려하는 바가 있어서인지 공감이 가는 설정이었다. 

주인공이 주문을 왜 읊어야 하는가가 애니메이션의 주된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요는 동화 속 주인공들이 실재한다고 믿는 아이들이 계속하여 있어야 세상에 꿈과 이를 담은 동화가 사라지지 않고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그런 주인공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고 하여도 물리적인 책 자체와 그 책 속에 그려진 삽화로서의 주인공 그림은 여전히 어느 서고에 남게 될 것이지만 애니메이션이 말하고자 함은 그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게임 속 아이템들은 그저 영과 일로 이루어진 디지털 부호의 조합에 불과한 것으로서 법적, 경제적으로 무가치한 것에 불과합니다.”

라고 피고인측 변호인은 변론했다. 연이어 “그렇기에 아이템은 물건이 아니며, 물건이 아니기에 절도죄의 대상도 될 수가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피고인은 무죄입니다.”그러나 네덜란드 대법관들은 고개를 저었다. 무가치한 것이라면 왜 피고인이 이를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가져가려 했겠는가? 이에 변호인은 “설사 아이템이 형법상 물건이라고 하여도 그 주인은 게임사이지 고소인인 플레이어는 아닙니다. 약관에서 게임 속 배경, 건물, 괴물, 캐릭터, 그리고 아이템은 모두 다 게임사의 것이라 되어 있고, 이 약관에 피고인은 물론 고소인도 동의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다투었다.

위 대화 내용은 유럽에서 인기 있는 룬스케이프(Runescape)라는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 관련 네덜란드 법정에 기소된 형사사건의 판결문의 설시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해본 것이다. 과연 대법관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이에 대답하기 이전에 옛날이야기 하나를 끼워놓고자 한다. 

13년 전인 1999년 즈음 온라인게임 범죄 수사를 하던 모 경찰관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할 때에 “피의자는 모월 모일 리니지 아덴월드에서 누구누구의 일본도 몇 정, 망토 몇 개, 보석 몇 개를 자신의 계정으로 옮겨”와 같은 식으로 작성한다고 하여 나는 “그렇게 하면 잘 모르는 사람은 이 어린 청년이 진짜 일본도와 진짜 보석을 가져간 것으로 오도될 수 있으니 ‘게임 아이템 정보인’과 같은 수식어를 넣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했었다.

그런데 진짜란 무엇이지? 그때 나는 진짜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쓴 것인가?

네덜란드 대법관들의 답변으로 돌아가 보자. 이들 대법관은 게임 아이템이 진짜다라고 일반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형법 절도죄 규범의 제정 목적, 기능을 고려하여 볼 때 형사법적 맥락에서는 게임 아이템이 (전기적 부호가 아닌) 물건이고 (게임사의 지배 아래 있다는 주장과 상관없이) 고소인인 플레이어의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약관에서 말한 게임 아이템이 게임사의 것이라는 객관적 문언의 규범적 의미와는 배치되나, 로그인 후 약관의 동의버튼을 클릭하고 서버에 접속하여 실제 게임 공간에서 플레이할 때 내 아바타의 아이템 보관박스 속의 것들은 그 누구도, 그것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임사라 하여도 어찌하지 못하는 나만의 것이라는 보는 나의 주관적 인식과는 들어맞는다. 

2000년 이래 우리 법원에도 룬스케이프 사건과 유사한 사례들은 많이 실제 사건화되었고 선고도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처럼 게임 아이템을 형사법상 ‘재물’로 본 정식 판결들은 없었지만, 재산상 이익 내지 정보로 보아 공갈죄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의 정보침해죄로 규율하여 실제 처벌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즉, 위 변호인의 두 가지 항변으로는 적용법조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무죄를 받아내기는 마찬가지로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하고 있다.


3.

플레이어 간에 발생한 형사사건에서 그것을 물건으로 파악하든 재산상 가치 있는 이익이나 정보로 보든(물론 이 차이가 주는 의미는 꽤 심대하지만) 플레이어의 아이템은 그의 것으로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반면, 게임사 대 플레이어 간의 민사사건에서는 플레이어가 아이템에 대해서 갖는 게임 내적 사실성보다는 게임사와 플레이어 간의 약속인 약관이라는 규범성이 법적 판단의 원천이 되어 왔고, 거의 모든 게임사가 게임 아이템을 게임사의 것으로 약관에 기술하였기에 게임사에 대한 소송에서 플레이어의 것이라는 주장은 기댈 곳이 없었다. 그 결과 약관 위반 시 게임 아이템이 잔뜩 담긴 계정이 영구히 압류되고, 게임 서비스 종료 시 게임 아이템도 함께 서버와 함께 폐기되어 갔다.

그러면, 이 글 서두의 주인공이 읊어야 하는 마법 주문은 동화 속에 빠진 아이들 사이에서만 통하고, 책을 사다 준 부모에게는 통하지 않는 그런 것이란 말인가? “앨리스는 지어낸 것이야. 이건 책일 뿐이라고.” 나는 작년까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아이들을 위해 수년간 산타가 되어왔다. 앞으로 어느 날인가 산타할아버지는 세상에 없다고 말해주거나 확인해줄 시점이 올 것임도 안다. 그 때가 오면 소급하여 지난 수년간 아이들 사이에서만 산타가 존재했고, 아이들과 나 사이에서 산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가? 아니면 적어도 지난 그 시공간 속에서는 나와 아이들, 아이들 사이 모두에 대해 산타는 실재했다고 볼 수 있는가?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들은 서비스된 지 15년 안팎이 되어가고 있다. 15년간 계속하여 접속하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으나 이 기간은 웬만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기간이다. 아, 여기서 사람은 법적인 사람인 법인, 즉 회사나 협동조합 등을 가리킨 것이다.

만약 15년 아니 자신이 생이 다하기까지 어떤 아버지가 산타 역할을 하고, 아이들도 그 믿음의 결정체를 손상당함 없이 이어갔다면 그 경우 산타는 실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만약 그 아버지가 15년 간 아니 영원히 계속하여 아이들끼리는 산타가 존재한다고 믿길 바라면서도, 4~5년째 이르러 맏이가 선물을 과하게 요구하자 버럭 화를 내며 “이건 너와 나 사이에서만 말하는 이야기인데 실은 아빠는 산타가 아니거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앞의 희망 사항과 양립 가능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풀이는 잠시 유보하고, 아래에서는 왜 이런 물음들, 즉, 산타가 실재하는가가 소위 가상세계라고 일컬어지는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 속 아이템 문제와 연결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4.

게임은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오락실, 1990년대 콘솔 게임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짧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고, 당시의 게임들 속에도 아이템이 물론 존재하였다. 패크맨에는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패크맨이 몬스터들을 피해 먹어야 하는 과일류로, 제비우스에는 먹으면 훨씬 전투력이 세지는 폭탄이나 레이저 등으로. 하지만 오늘날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에서와 같은 아이템의 현금거래라는 문제는 그 때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불가능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왜일까? 첫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위 게임들은 주로 1인용 게임으로 고안되었고, 설사 2인간 대전게임 기능이 있었다고 하여도 플레이어 간에 이를 게임 내적으로 양도할 방법이 구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위 게임들은 엔딩이 비교적 짧은 단위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당시 게임기의 연산처리능력 및 기억장치 용량이 낮았다는 물리적 요인과 수익 창출을 위해 게임의 난도를 증대시켜 되도록 빨리 플레이어의 캐릭터를 죽게 유도함으로써 다시금 코인을 투입토록 한다는 경제적 요인이 결부되었다. 

따라서 게임 아이템이 그래픽 요소나 코드 요소로서 게임 내 탑재되어있다는 것 자체가 가치 창출의 동인은 아님을 여기서 추측해볼 수 있다. 아이템 기능이 구현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존재하는(existe) 것으로서 지어낸(inventé) 것에 미치지는 못한다.

세월이 흘러 2000년의 피시방 속 플레이어들은 4:4 대전이 지원되는 네트워크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하였다. 그것은 80,90년대의 2인 대전게임의 것을 능가하는 플레이 경험을 주었지만, 게임 아이템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게임이었다. 게이머가 스타크래프트 속에서 키운 캐릭터와 획득한 아이템들은 통상 20~30분 내에 항복을 뜻함을 ‘GG’문구를 스크린에 입력함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플레이어들은 곧 그것과 존재의 평면을 달리하는 새로운 형식의 게임과 조우하고 이 세계에 점차 빠지게 되었다. 천여 명에 달하는 동시 접속 플레이어들이 하나의 서버/대륙에서 어슬렁대는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이라고 분류된 리니지의 세계였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은 수많은 플레이어가 자신을 나타내는 아바타를 통해 말싸움과 몸싸움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집단적 싸움이 가능해졌다는 것과 아울러 주목할 것은 - 프로그래머의 의도된 기획인지는 통속적인 답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 아바타가 소지하던 아이템이 다시 게임 속 공간에 떨구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떨구어지는 것은 소지자의 능동적 행동(일부러 아이템을 보관함에서 꺼내어 땅에 내려놓는 형)에 의하여도, 수동적 행동(다른 아바타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는 형식)에 의하여도 가능하다. 전통적 게임 문법에 따라 리니지 속에서도 떨구어진 아이템은 다시 획득될 수 있는데, 이 떨굼과 줏음이 동일 공간 속 제3의 플레이어의 존재라는 요소와 결합되면 게임 속 아이템의 거래를 창발시키는 제1 요인이 된다.

공식적인 교환창(판매자 아바타와 구매자 아바타 사이의 아이템 거래를 보다 편리하게 도와주는 통상 작은 윈도우형식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이 지원되기 이전에도 위 떨구기 기능을 통해 거래(증여와 매매, 강탈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서)가 싹튼 것이다.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들은 번쩍이는 아이템을 많이 가진 고레벨 아바타를 쫓아 아이템 구걸을 했고, 그가 떨군 아이템을 주우며 감사해 했다. 그리고 기꺼이 그가 리더로 있는 혈맹의 일원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당시 리니지는 가정 내 컴퓨터보다는 피시방의 피시를 통하여 많이 플레이 되고 서비스 되었는데 피시방업주들은 위와 같은 게임 속 증여행위를 통하여 피시방 판촉 등 영업행위를 도모하기도 했다. 즉, 어느 피시방에 가면 쓸만한 아이템을 나눠 준다는 소문이 돌았고, 특정 피시방의 단골들은 게임 속에서도 같은 혈맹원으로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틀어 진한 소속감을 갖고 플레이하였다 한다.

그런데 만약 어느 피시방업주가 자신 또는 자신을 추종하는 혈원들이 획득한 게임 아이템만으로는 신규 피시방 손님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수량확보를 못한 상황에 부닥친 경우, 어떤 식으로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까?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20세기 말엽 등장한 우리나라 아이템 현금거래 1호의 사연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위 질문에 대한 유력한 답이 그 1호일 수 있다는 상상은 지나친 것은 아니리라.


5.

1호 아이템 현금거래가 생긴 이후 그로부터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아 나타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언론에 불거지는 아이템 현금거래 관련 각종 파생 문제들이 있다. 게임 중독문제, 아이템 거래에 수반된 강탈과 편취문제, 외국환거래법 관련 문제, 자동사냥 프로그램 제작 배포 사용 문제, 사행성 논란 등이 그것이다. 해결을 위해 국회차원의 공청회도 열리고, 정부 당국에서도 게임법 개정을 통해 부분적 규제를 시도하여 오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 문제인 게임 아이템의 거래 자체에 대하여는 2000년 당시의 신문기사가 다시금 똑같이 오늘날 복사되고 있는 형국이다.

만약 혹자가 주장하듯 아이템 현금거래 자체가 절대 악이라면 이를 한 순간에 사라지게 할 마법의 주문서와 지팡이를 갖고 있는 게임사가 이를 진즉 봉쇄할 수 있었고 그랬을 것이다. 그 방법의 하나는 눈치를 채셨겠지만 바로 떨구는 기능과 교환창 기능을 게임 시스템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한번 주운 아이템은 두 번 다시 버릴 수 없게 하는 것인데 이러면 획득된 아이템은 실질에 있어서는 더 이상 아이템으로서가 아니라 아바타의 일부분이 돼버리게 된다(이를 귀속 아이템이라 속칭한다). 또 다른 방식은 아이템의 아바타 간 유통은 허용하되 플레이어 간 매매를 금지하고 대신 경매 형식의 간접적인 교환만을 코딩하여 게임 내 허용하는 것이다. 이런 수단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런 선택을 게임사들이 내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게임사들은 바로 자기 아이들은 영원히 산타가 있다고 믿길 원하는 부모와 같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의 창시자들은 게임 속이 하나의 세상이길 희망한다. 그곳은 실재와 같아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실재로부터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근대 시민혁명 이래 오늘날 왜 거래의 기본 형태가 왜 증여가 아닌 매매인지, 왜 공매나 경매가 아닌 매매인지 되물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매매는 우리의 일상에 공기와 같이 편재하여 있다. 왜 매매인가? 얼핏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묻는 질문에 답하기가 주저 되지만, 조심스레 하여 본다면 경매는 가장 좋은 값에 물건을 고르는 것임에 반하여, 증여 그리고 매매는 가장 좋은 상대방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는 차이를 가리키고자 한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의 경우 게임사는 게임 속 아이템을 게임 속 아이템이나 화폐와 등가교환(매매) 하는 것에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장려한다. 게임사가 약관 등으로 규제하는 아이템 현금거래는 게임 속 아바타 입장에서 보면 증여(비등가교환)의 형식을 띠는 데 그 아이템에 대한 대가가 게임 외에서 지급되므로 실제 플레이어의 시각에서 보면 등가교환이 된다는 점에서 전자와 같게 된다. 정리하면 위 아이템 거래는 그것이 게임 내 화폐거래든 게임 밖 현금거래든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의 이데아 속에 내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에서 플레이어들과 게임사 모두 똑같이 원하는 것은 공간 속 다른 사람과의 만남(물건의 지배가 아닌)이며, 이를 위하여 아이템 획득 자체가 아닌 이를 매개로 하는 사건(획득/교환)을 스스로 자유롭게 일으킬 수 있음이 그 최적 실천양식이기 때문이다.


6.

교환의 형식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 교환의 원인 혹은 동기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사실 이 물음이 먼저 나왔어야 할 것인지 모른다. 앞서 15년째 운영된다는 설명에서 살짝 비추었듯이 80,90년대 게임과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는 그 공식적 엔딩의 유무에서 차이가 난다. 만약 리니지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예컨대 3월 경과시 해당 플레이어에 대하여 서비스 만기가 도달하여 종료된다고 한다면 아이템 현금거래가 발생하지 아니하였거나 했다고 해도 활성화되기에 충분한 지점까지 도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오락실 게임 전성시대와는 달리 향상된 컴퓨터 처리능력과 광대한 메모리 용량 등의 기술적 토대는 플레이어를 빨리 죽게 하여 다시 코인을 넣게 하기 보다는 정반대의 영업방식을 취하게끔 한다. 즉, 되도록 오래 플레이어를 게임공간 속에서 활동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는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 초기에 일반화된 계정이용료 월정액 납부 모델에서 뚜렷하게 잘 나타나고 있고, 수년 전부터 나타난 ‘게임 기본서비스 무료, 일정 아이템 과금’ 방식의 모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엔딩의 부재로 플레이어 시각에서 보면 시간상으로 1레벨 진입시기가 각각 다른 수천의 아바타들이 공간적으로는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 결과 소위 출발 선상의 평등은 성립이 불가하다. 특히나 아이템의 획득 조건이 슬롯머신이나 고스톱 류와 같이 우연성에 기인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플레이어 자신의 두뇌 회전이나 손 조작과 같은 기술특성에 주로 기인하는 경우라면 시간적 불평등함이 사후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온전히 또는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하겠지만(운이 좋거나, 손놀림이 좋은 자이거나), 들인 시간의 절대량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 성실성이 중추적인 경우에는 그야말로 위 선재하는 불평등의 재조정은 난해하다. 적어도 개별 아바타 차원에서는 그러하다. 

여기서 잠깐! 가상사회가 아닌 다시 오늘날 실재 사회를 응시하여 보자. 왜? 사회적 생산물의 절대량은 도박꾼이나 천재가 아니라 일반 노동자(블루칼라든 화이트칼라든)에 의하여 창출되는 것일까? 왜 결과물이 아닌 시간을 측정도구 삼아 급여로 받는 것일까?  

앞서 개별 플레이어나 아바타 차원에서 위 구조적으로 누적된 불평등을 혼자서 극복해나가기란 매우 곤란할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그 해법을 역시 실재 사회와 견주어 찾아보면,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과 만나서 집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야 가능한 것일 것이고, 그럼 그 방식은 두 가지, 즉 정치(혈맹원에 가입)와 시장(아이템 거래)일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에서는 대개의 경우 게임 내 정치를 위한 특별한 인터페이스(예컨대 선거 시스템, 투표 시스템)는 따로 주고 있지 않지만,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이니 통로로서 대화창이라고 불리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존재한다. 가끔 언론에도 보도되는 게임사의 정책 등에 항의하는 게임 속 시위라든지, 부당한 정신적 피해나 육체적 질환 등으로 어려움에 빠진 플레이어를 실제로 돕기 위한 플레이어들의 집단적 운동이 바로 이런 대화창을 매개로 구현되었다.

다음으로 떨구기 기능이나 교환창을 통한 거래(증여/매매/현금거래) 역시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 속 자원 재배치를 통한 분배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빠른 레벨업을 꿈꾸는 개별 플레이어 단위에 머물지 않는데, 가상공간 속 지배적 집단은 정치적으로 가입자 수와 더불어 보유 아이템의 양에 의하여 정해지기 때문이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 속 경제체제는 평시체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대규모 전쟁이나 그 준비, 몬스터의 습격 등으로 주기적으로 꾸준히 아이템의 소모되도록 기획되거나 운용되어지는바, 플레이어 개체 차원에서도, 지배권을 둔 경쟁 집단 차원에서도 아이템 획득을 위한 수요는 그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창출되고 있다.


7.

수요의 존재 이유가 운이나 특수 기술로는 충당되기 어렵다는 데, 즉 사람들끼리는 상호간 온전히 평등하지도 온전히 불평등하지도 않다는 데에 기인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면서 아래에서 아이템의 공급/생산 측면을 살펴본다. 

게임 속 아이템을 생산․획득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표준적인 게임 문법은 살해행위(killing, 이하 ‘킬링’이라 함)다. 이렇게 글로 쓰면 자칫 과하게 폭력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게임 플레이 속 킬링은 아이폰 게임 앵그리 버드에서 새가 돼지를 퇴치한다거나, 스타크래프트 속 전투 상황 등을 떠올려보면 ‘살해’라는 단어의 구체적 표현형식의 폭이 매우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킬링이라는 단어가 금기의 언어처럼 비지지만, 달리 보면 실제로 인간을 비롯하여 고등생물들은 생존을 위하여 먹이 사슬의 아래에 해당하는 외계의 생명체들을 일상적으로 킬링하여 흡수, 자신의 신체 에너지의 평형상태를 유지해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에서도 일반적으로 게임 속 아바타들은 게임 속 평원이나 동굴 속에 서식하는 동물형 괴물들과 인간형 괴물들을 사냥하여 가죽이나 보물, 무기류 및 게임 화폐로 표현된 아이템을 획득한다. 앞서 보았듯이 사냥이 오로지 운에 의하여 좌우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유목민의 사냥이 그러하듯 준비-탐색-대결이라는 시공간적 경로를 다른 플레이어와 경쟁상황 속에서 밟는 목적적 행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이 통상적인 성실함을 너머서는 고도의 특별한 인지판단능력과 신체반응능력을 플레이어에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다중플레이어’라는 용어 속에 담긴 플레이의 대중성과 소박성(캐주얼성)이란 요소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괴물 사냥은 많은 경우 몇 개의 키보드 버튼 누름과 마우스 클릭의 반복으로 종결된다. 운에 좌우되는 슬롯머신형 게임은 총알택시 탑승에, 하드코어한 지적, 신체적 능력을 요구하는 대전전략게임은 스포츠카시합의 운전에 가깝다면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은 일반 출퇴근 승용차 운전에 빗댈 수 있다.

 총알택시 탑승과 스포츠카 운전이 둘 다 목적지가 분명하고, 자기의 목숨을 건다는 데에서 나오는 긴장과 자극이 쾌락을 낳음에 반하여, 출퇴근 승용차 운전은 필요하기에 안 할 수 없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니 상대적으로 지루해지기 쉽고 시내 주행시의 가다 서다 반복은 자연스레 오토매틱이나 크루즈 기능을 갈망하게 한다. 승용차 운전자 간의 손쉬운 경력 비교는 센터페시아의 총 주행거리로 말해진다.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 속에는 통상 아이템의 시간에 따른 감가상각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정하기를 애초 레벨1 플레이어의 최초 활동구역을 A라 하고, 총 주행거리 10,000 이상일 경우 새로운 공간인 B로의 진입 허가를, 20,000 이상일 경우 또 새로운 공간 C로의 진입을 허가해 준다고 하면, 총 주행거리 300의 풋내기 플레이어가 오프라인의 친구인 총 주행거리 23,000 플레이어를 만나 같이 놀려면 몸소 운전하여 오랜 기간 바퀴 굴려 20,000 이상으로 올려 C로 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20,000이 된다고 하여 타던 차가 짜릿한 스포츠카를 모는 것으로 바뀌어 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20,000 돌파의 동기는 운전 자체의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그 친구와 함께 공간 C에서 돌아다니기, 혹은 보기 싫은 총 주행거리 10,000대의 적수를 회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300에서 20,000까지의 일반 승용차 운전은 어떤 의미일 것인가?


8.

 게임사들은 레벨업을 위한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출퇴근 운전같은 게임 속 사냥 역시 게임의 합의된 플레이이고, 플레이어는 이를 통해 그 자체에서 목적한바 즐거움을 얻게 된다고 설명하곤 한다. 그렇기에 그 결과 얻은 20,000이란 숫자는 마치 빵을 먹은 개수를 지칭하는 것과 같은 상징적 부호일 따름이고 그것에 달리 유의미한 가치가 담긴 것, 즉 빵 자체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디서 본 문구와 닮았다. 그렇다. 바로 룬스케이프 게임 아이템 절취사건에서 피고 변호인의 변론 내용이다. 그런데 어떤 플레이가 오락인지 노동인지를 가리는 것, 바꿔 말해 게임 플레이가 그 자체로 플레이어에게 만족을 주는 것으로써 행위의 과정 속에서 모두 타버리고 끝에 남은 아이템이라는 것은 그저 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유예된 만족으로써 구워져서 그 끝에 아이템이라는 도자기가 얻어지는 것인지 여부는 일방의 주장이 아니라 사회 속 보편 인식 위에서,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으로, 사전적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닐까?

게임사들은 아이템이 무가치하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약관 등에서 게임 아이템은 게임사의 것이라고 선언하곤 한다. 엄밀히 말해 무가치하다면 게임사에 대하여도 무가치한 것이어야 하므로 약관에 규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임사는 아이템의 현금 매매를 엄격히 금지하면서 논거로 아이템이 게임사의 것이라고 위 약관을 들곤 한다. 아이템이 게임사의 것이란 말에서 이를 정당화할 어떤 가치가 들어 있는지 찾아본다면 아이템의 그래픽 디자인이나 기능 구현체로서 프로그램 코드에 관한 저작권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독할 수 있겠다.

 

9.

앞서 든 예에서 등장한 승용차는 모두 하나의 자동차제작 겸 렌터카 회사의 소유 렌터카이고 렌터카끼리 바꿔 타는 것이 렌터카회사의 허가를 필요함 없이 회원 간 자유로이 가능하다는 가정을 추가하자. 차의 센터페시아에 찍힌 총 주행거리가 그 운전자가 시공간을 달려가며 달성한 지표임을 아는 자라면, 그리고 그의 의도는 반복되는 일상의 운전 자체에 있지 않고 다른 구역에서 친구를 만난다는 데 있다면 기꺼이 대가를 지급해서도 그런 렌트카를, 더 명징하게는 총 주행거리를 얻고자 할 것이다. 바로 주행거리 현금거래다.

그런데 렌터카 이용계약을 맺은 사람 간의 렌터카 바꿔 타기의 경우 승용차의 디자인 등의 권리는 매매 전후를 불문하고 여전히 자동차회사에 있고 렌터카 이용허락을 받은 자 간의 교환행위가 회사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예컨대 복제, 전송, 배포가 아님도 분명하다. 

렌터카 교환에서 그 대상물이 렌터카 자체가 아닌 총주행거리라는 지표에 관한 것이 맞다면 결국 게임 아이템 현금거래의 금지 근거로서 게임사의 것이라는 말은 달리 위 총 주행거리 가 게임사의 것이라는 말이 성립되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바퀴가 축을 중심으로 돌 때마다 마일리지가 올라가도록 설계하고 이를 기능적으로 구현시켜 놓은 것은 자동차제작사 겸 렌터카 서비스 회사이고, 나아가 그 렌터카가 돌아다닐 그 모든 거리를 건설하고, 진입 가능한 단계별 구획 설정을 한 것 역시 같은 회사라고 치더라도 그러나 그 정도로서 특정 렌터카 주행거리의 적분 값이 위 회사의 것이고 회사가 임의로 변경, 처분, 폐기할 수 있는 것인가?

한 공간 속 렌터카 총 수량은 특정 시기를 기준으로 일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가 일정하다고 쳐도 운전행위에 연동하여 렌터카 속 마일리지의 누적분 값은 계속 증가한다. 즉, 전자가 제로섬 상황이더라도 후자는 플러스 섬 상태일 수 있고, 그 부가가치의 근원은 제작행위나 운영행위라기보다는 이용자의 운전행위, 게임으로 돌아가면 바로 플레이어의 플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게임 아이템이 게임사의 것이라고 한 게임사의 언명은 최종적으로 플레이어의 플레이가 게임사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치환된다.


10.

위 치환된 명제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부가가치인 플레이어의 플레이는 바로 게임사의 소유가 되는가? 앞서 아이템의 일반적 획득은 플레이어의 킬링행위에 의하며, 킬링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자기 생명체의 내적 동적 평형을 이루기 위한 목적적 행위라고 했었다. 그런데 위와 같이 치환된 명제에 따르면 눈 앞에서 아이템을 내놓으며 죽어가는 가상 속 괴물은 동시에 현실 속 나를 킬링하고 나로부터 플레이 에너지를 흡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플레이가 오직 나에게만 의미를 갖고 게임사에겐 무가치한 1인용 게임과 달리 다중사용자 온라인역할수행게임에서는 나의 플레이는 다른 이에게는 게임상의 콘텐츠가 되고, 그러므로 게임사에게도 득이 된다. 내가 특정 괴물을 잡는다는 플레이가 동시에 인근의 다른 이에겐 그 사냥의 기회를 빼앗는다는 측면에서 소위 게임 속 경쟁요소(argon)을 낳게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그래서 다중사용자 역할수행게임의 게임사는 하나의 플레이를 취하여 다른 플레이와 충돌시켜 연쇄적인 융합작용을 일으키려 노력하게 된다. 이 점은 페이스북 등에서 서비스되는 소셜게임들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거기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플레이어들 간의 플레이가 콘텐츠의 전부와 진배없이 이용된다. 

가치를 담지한 플레이를 게임사가 취하려면, 즉, 타인의 행위 또는 그 결과를 급부의 목적물로 하여 (다른 플레이어에게 제공할 의도로) 자신의 것으로 귀속시키고자 한다면 그 법적인 형식으로 노예계약이 폐지된 오늘날에는 고용, 도급, 현상광고와 같은 유상계약을 떠올릴 수 있다. 유상계약(有償契約)이란 계약의 당사자가 상호간에 대가적(對價的) 의의를 갖는 출연을 하는 계약을 말한다. 그러면 게임사는 과연 무슨 대가를 주고 플레이어로부터 플레이를 가져가는 것일까? 약관을 읽거나 실제 운용을 보아도 일반적으로 플레이에 대하여 현실의 금전이나 이익 등을 반대 급부로 주는 면모는 찾아지지 않는다(사실 플레이를 취한다는 면 자체가 가려져 있다). 그렇다면 일방적 착취로서 무효인 것일까?

그렇다고 속단할 수는 없는데 실재/가상 사이의 장막을 거두어 보면 게임사가 그 플레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아이템, 경험치 등에 대한 보유권을 플레이어에게 주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유권을 지닌 플레이어는 이 권리에 대한 점유를 양도하는 방식에 의하여 처분까지도 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것이 아이템 현금거래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되면 앞서 출발점은 ‘아이템은 게임사의 것이다’라는 것이었는데 ‘플레이가 게임사의 것이다’라고 적힌 반환점을 돌고 나니 ‘아이템은 플레이어의 것이다’라는 현수막이 달린 도착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11.

옛 80, 90년대 1인용 게임 시절, 게임 속 아이템을 소유한다는 게이머의 주관적 인식은 그저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고, 게임사에게도 플레이어의 플레이를 산다는 동기는 불필요하였고 동시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의 게임제작자와 플레이어는 각자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이템과 플레이는 각각 패키지와 플레이어의 몸 안에 얌전히 머문 채 있었다. 

기계공이자 마술사 출신 조르주 멜리에스는 스톱모션 기법을 최초로 영화에 도입, 종래 연속적인 필름 촬영에 근거하여 사실적인 다큐멘타리 양식만 가능하다고 본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 대한 시각을 깨뜨리고 판타지 로망극을 영화 양식으로 일구어냈다. 스톱모션기법은 연속된 필름을 잘라내어 적절한 필름 컷들을 골라 다시 붙여 연결하여 재생하는 방식인데, 이를 통해 순식간에 사람을 펑하고 사라지게 하거나 변신한 것처럼 보이도록 할 수 있었다. 그가 시도한 혁신에 의하여 오늘날 영화가 상상과 허구의 예술의 장르로서 불리게 된 것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한편, 2000년대 이래 인터넷 기술은 마치 조르주 멜리에스의 스톱모션기법과도 같이 멀리 떨어진 것들을 순식간에 연결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패키지와 몸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공간이, 정확히는 그 공간을 응시하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려 하고 있다.

게임에서 아이템과 플레이는 연속적인 아날로그 위상에서는 서로 이격되어 있었으나, 인터넷에 기반한 다중플레이어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에서 이 둘은 디지털 용접에 의해 혼융되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아직 게임사들은 뤼미에르 형제가 그러했듯이 여전히 관성적인 틀 속에서 머물고 있어 보인다. 스톱모션기법에 의하여 영화가 실재적인 것에서 환상의 것으로 변화․성장하였다면, 인터넷이란 플랫폼에 의하여 게임은 환상의 것에서 실재적인 것으로 승화될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조르주 멜리에스가 파산하고 그의 자동인형이 고장 나고 불탄 후에야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지, 이립에서 출발하여 불혹에 이른 오늘 - 곁에서 지켜보는 이의 마음이 초조해진다.신 지평을 그려낼 자동인형은

가상 아이템의 현실 화폐 매수라는 것과

현실 플레이의 가상 화폐 매수라는 것의 겹침을 인지하는 데서 작동하기 시작하리라 본다.

가상 아이템은 현실 화폐로도, 가상 화폐로도 교환할 수 있으며, 

현실 플레이는 가상 화폐로도 현실 화폐로도 교환 가능하다. 


12.

사물들이 설사 표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도,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해 공통의 의견을 형성하고 보편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그 사물의 실재성을 주장하기에 충분하다. 십여 년 전 피의자신문조서의 문구를 고치라고 태연히 권유하던 “진짜” 난독증 환자가.


“Ce n'est pas parce que 

c'est inventé

que ça n'existe pas”


“지어낸 것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