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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헌집

가상의 규범과 현실 규범간의 인터페이스

암흑의 마법에서 정의의 칼로


-가상의 규범과 현실의 규범간의 인터페이스(1999년 공정위 약관심사과 제출안: 2002년 일부 수정) --윤웅기

가상세계는 지나치게 실재세계와 같아서는 안 된다. 만약 실제세계와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상상력에 제동을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닻이 내려진 실제의 세계와 대비시킬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가상적일 수 있다. 그래야만 가상세계가 상상적 실재의 미묘함을 간직하고, 중독적인 것이지 않으면서 즐거운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Michael Heim, The Metaphysics of Virtual Reality

 

우리나라에서 98년경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온라인 머드게임 속 캐릭터나 아이템의 현금매매는 종래의 오락실 게임과 달리 온라인 머드게임이란 것이 다수의 동시접속 사용자들이 플레이하는 매우 강한 사회성을 띄는 게임인데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온라인 머드게임(이하 '온라인 게임'이라 줄여 부름)을 불완전하긴 하나 다가올 가상사회의 초기형태라 보며 현금매매 현상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해킹, PK 등의 게임 내 폭력 모두 바람직한 가상/현실간의 관계 설정을 찾아가기 위한 힘들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는 여행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디/아이템 현금매매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서의 금권을 통해 가상세계에서의 지위를 쉽게 사려하고 가상공간에서 투자한 시간을 현실시장에서의 돈으로 직접 보상받으려는 가상/현실간의 의사합치의 결과로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두를 우리나라 게이머의 미성숙함이나 온라인 게임을 둘러싼 피시방 업주, 게임회사, 게이머간의 자본주의적 욕심의 발로 탓이라 간단히 치부하고 단지 PK나 아이템 매매를 금지 여부에 논의를 한정지어버려선 안 될 것입니다.


 

온라인 게임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영화 끝자락에서 인지한 것같이 게임회사가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 코드 덩어리(0과 1의 디지털 코드)이며 가상의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아이템, 그리고 걸어다니는 캐릭터 이 모든 것이 게임회사의 지적 영상 창작물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기에 법적으로 보면 게임 프로그램 및 그의 영상적 표현물인 아바타, 아이템, 게임 공간 모두 게임회사의 지적재산권이 되고 저작권법, 음비게법과 같은 정부입법의 규제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기존의 패키지 게임과 달리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는 게임 속에서 단지 프로그래밍된 대로 플레이만 행하는 전통적인 수세적 지위를 갖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거꾸로 게이머의 참여가 없는 온라인 게임은 성립조차 불가능합니다. 1인의 게이머로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게임 그렇기에 사회성을 그 본질적 요소로 삼는 온라인 게임 속에서 게이머의 지위는 완성된 게임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프로그램 코드를 갖고 미완의 스토리를 자유롭게 채워나가는 공동 연주자이자 작가 집단과 흡사한 지위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중의 주체가 만드는 사회이기에 온라인 게임의 경우, 거기에는 질서를 잡는 두 개의 규칙 즉, 가상사회 밖의 게임회사, 정부 등이 게임 코드에 적용시키고자 정한 규칙과 가상사회 내에서 게이머들끼리 형성해낸 규칙 양자에 의해 가상사회가 운영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약관이나 등급제도 등의 공식적 형태로 성립된다면(formal law), 후자는 게임 속 네티켓 혹은 켄트성의 군주의 명령과 같은 비공식적(informal law) 형태로 존재합니다.


 

공식적 규범이 현실 법에 의해 그 강제력이 바로 인정되는 것과 달리 게이머들이 만들어 내는 비공식적 규범들은 게임회사 프로그래머의 지원이 없이는 효력 발휘가 어렵다는 특징과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게이머들이 게임 속 의회제도나 사법제도를 스스로 운영하고자 하여도 이를 지원하는 프로그램 코드를 게임회사가 거부한다면 허공 속 외침에 그치기 때문입니다(후에 말씀드리겠지만 온라인 게임 약관의 공정성을 다룸에 있어 타겟으로 삼아야 할 부분은 드러나는 아이템 매매 부분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게이머들의 한계 상황이라 할 것입니다).


 

다시 계정/아이템 현금매매로 돌아가겠습니다.


 

동 매매의 주된 원인은 게임속 사회의 경제시스템⑴에 기인합니다. 성장만을 향한 레벨 올리기 시스템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게임 속 사회의 피드백 체계를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⑵ 오락성만을 추구한다면 단지 남을 죽이고 명성을 높이는 데 필요한 프로그램 코드(이하 '킬링 코드')만으로 족하겠으나 이미 수 만 명의 게이머들이 그들을 대리하는 캐릭터를 통해 로그 인하여 들어가 가상사회를 이루고 있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킬링 코드(killing code)외에 힐링 코드(healing code)⑶의 도입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될 시기라고 판단합니다.


 

계정/아이템 매매 현상은 킬링 코드만 있는 게임 시스템에서 채워지지 못한 욕구를 게이머들이 현실에서 보상받고자 분출해낸 결과입니다. 한국의 게이머들은 이미 폭력적 물신적 킬링 코드에 빠져있기에 의회제도나 청원제도 등의 힐링 코드는 도입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조소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사회는 게임회사와 게이머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양자간의 부단한 교차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부정형의 가능태이고 힐링코드 또한 운용여하에 따라서는 킬링 코드에 버금가는 재미와 그 이상의 감동을 줄 수 있음(최근 글루디오 서버 사건은 그 가능성의 하나)을 자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상사회 자율치유제도인 힐링 코드의 가능성과 효율성을 무시하고 등급제, 형사처벌과 같은 가상사회 밖의 규제책으로 킬링 코드만 고치는 것은 반쪽뿐인 해법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⑷

아이템문제를 비롯한 가상사회 전반의 문제 해결에 있어 다음의 인용문은 경청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가상 사회 시스템은 네트워크 장비를 갖춘 하드웨어와 그 하드웨어를 조작하고 사용자와 상호 작용하는 소프트웨어의 세트이다. 그러므로 가상 사회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 컴퓨터 기술이 요구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많은 가상 사회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같은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가들에 의해 설계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컴퓨터 전문가들로만 구성된 설계팀은 종종 가상 사회의 사회적인 요소가 끼치는 영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예 무시한 채로 오직 시스템의 구현과 최적화에만 개발력을 집중하는 오류를 범한다. 조금 우습게 표현하자면 '가상 사회 시스템'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라는 단어를 쏙 빼놓은 채 '가상'과 '시스템'에만 힘을 쓴다는 것이다.⑸

그렇습니다. 리니지를 비롯한 온라인 게임에서 모자란 것은 코드에 대한 게임회사 및 정부의 규제가 아니라 그 사회성에 대한 진지하고도 실험적인 탐구정신입니다. 온라인 게임이 양과 질면에서 가상사회의 모습으로 성장해 갈수록 가상공간 속의 자생적 규범과 이를 지원하는 현실 규범과의 조화 필요성⑹은 절실해져 갈 것입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본격화 할 가상사회 운용 능력(이는 장차 대한민국의 행정력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도 모를)을 축적할 소중한 기회는 바로 지금 우리 앞에 와있습니다.